한국인의 밥상
kbs 한국인의 밥상은 목요일 저녁 7시 40분에 방영하는 프로그램으로 최불암 선생님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다양한 지역의 동네를 둘러보는데요. 이곳에 나오는 여러 맛집 정보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민들의 애환 뿐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맛집, 특산품, 볼거리를 아래에서 확인 바랍니다.

바다는 찬바람이 불수록 깊은 맛을 낸다. 바닷속 생물들은 추위를 견디려 지방을 축적하고, 살이 단단해지며 맛과 식감이 배가되기 때문. 사계절 중 겨울에 가장 맛있다는 바다의 별미와 겨울 바다의 추억이 가득 담긴 밥상을 만난다. 바다가 삶의 일부이자 환경 그 자체인 사람들이 있다. 혹독하리만큼 거센 겨울 바다는 때때로 그들의 삶을 버겁게 하지만 깊은 맛을 품은 보물 같은 진미를 내어준다. 바다 앞에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겨울의 끝자락에서 차려낸 밥상으로 겨울 바다의 참맛을 만나보자.

강원도 양양의 낙산항에서 30년 이상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김대곤(73세) 선장. 며칠 동안 동해안에 내려졌던 풍랑주의보가 해제되자, 서둘러 조업 채비에 나선다. 바다에 쳐놓은 그물을 며칠째 걷지 못한 데다, 겨울이 제철인 도치를 잡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도치는 평소 수심이 깊은 심해에 살다가 산란기가 되는 겨울이면 알을 먹는 심해의 천적들을 피해 연안으로 나와 빨판을 바위에 붙인 채 해초들 사이에 부화하는 동해안의 겨울 진객이다. 그 생김새가 심통 맞게 생겨 심퉁이라고도 불리는 도치는 물메기, 아귀와 함께 대표적인 못난이 생선 생선으로 꼽히지만, 명태가 사라진 동해안에서 새로운 겨울 특산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물고기이기도 하다. 그가 풍랑을 헤치고 도치를 잡아 오자, 그의 아내 송연옥(65세) 씨는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도치 음식을 준비한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도치와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이웃과 그 맛과 추억을 나누기 위해서다.
도치 수놈으로는 숙회를 만드는데 뜨거운 물로 점액질을 깨끗이 벗겨낸 뒤 적당한 시간 동안 삶아줘야 쫄깃하고 담백한 도치 특유의 맛을 얻을 수 있다. 과정은 번잡하지만, 맛은 어느 숙회에 뒤지지 않는단다. 도치 알은 소금물에 씻어 두부처럼 굳히는데 지금도 제사상에 올라가는 귀한 음식이다. 이렇듯 도치 음식 하나하나에는 도치와 더불어 살며 터득한 지혜와 정성이 담겨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목선 하나에 의지해 거친 겨울 바다로 나가 조업을 했던 낙산항 사람들. 겨울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버릴 수 없었고, 항구 여자들은 도치를 머리에 이고 십 리 이십 리 길을 걸어서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도치를 팔아 보리쌀과 감자로 바꿔 와 생계를 꾸렸다. 그 시절의 눈물겨운 추억이 도치 두루치기와 해풍에 말린 반건조 도치 볶음에 녹아있다. 지금은 도치가 지역의 명물이 되어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바람에, 항구 사람들도 직접 잡는 어부가 아니면 도치 음식을 자주 맛보기 힘든 상황. 그래도 도치의 추억이 있어, 항구 사람들의 겨울은 여전히 넉넉하다.

엄마 같은 언니가 지키는 곰삭은 밥상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막힘없이 탁 트인 너른 바다를 품고 있는 경북 영덕은 동시에 백두대간의 능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산간 지역이기도 하다. 바닷가에서 산속으로 6킬로미터를 들어가는 금곡리에 사는 김위자 씨(61세) 천희득 씨(60세) 부부. 겨울이 다가오자 고랭지 배추를 수확해 김장하느라 분주하다. 고단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내의 친정 동생들까지 모여들어 웃음꽃이 핀다. 친정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친정집을 지키는 맏언니네 덕분에 누리는 행복인데, 곰삭은 겨울 음식 하나하나에 남다른 사연들이 숨어있다.
산간마을이지만 바닷가 생활권이다 보니, 날생선을 넣어 담그는 김장 김치. 예전에는 방문 앞까지 눈이 차오르던 마을이라 겨울이면 고립되기 일쑤였다. 그 시절, 형제들에게는 김치 속에 든 생선 한 토막이 유일한 별미로 먼저 집으려는 눈치 싸움이 치열했었다. 약초꾼이었던 아버지는 넉넉하게 생선을 사 올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그 길고 혹독했던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었던 힘은 형제들의 우애와 곰삭은 맛이었다. 그 시절에 먹던 삭힌 깻잎김치를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김위자 씨. 여름에 따서 잘 삭힌 깻잎에 전갱이 액젓으로 간을 하다 보면 여동생은 저절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집안의 맏이였던 언니가 중학교만 졸업한 뒤 공장에 취직해 고등학교 대학교 등록금을 대주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시절이라고 맏이가 다 그렇게 산 건 아닌데, 당연한 내 일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김위자 씨. 환갑을 넘긴 지금도 동생들 먹을거리를 챙기느라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언니의 곰삭은 밥상은 어떤 맛일까.